사건은 끝났는데 왜 질서는 돌아오지 않는가: 범죄 영화 결말의 세 가지 상태

「프렌치 커넥션」(1971)은 마지막에 사진 위로 글자를 올린다. 미국영화연구소 목록은 이 대목을 각 범죄자가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갔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았는지 알리는 자막이라고 기록하고, 마지막 자막을 이렇게 옮겨 적는다. 알랭 샤르니에는 끝내 잡히지 않았고 프랑스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형사 도일과 루소는 마약수사국에서 다른 곳으로 전출됐다.

압수는 있었다. 체포도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관객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것은 성과 보고가 아니라 명단이다. 사건 파일은 닫혔는데 그 파일 바깥의 세계는 닫히지 않았다.

세 가지를 따로 센다

범죄물의 마지막 10분을 볼 때 세 가지를 따로 세어보면 같은 결말이 다르게 읽힌다.

  • 사건이 종결됐는가. 범인이 특정되고 물증이 확보되고 추적이 끝났는가.
  • 정의가 실현됐는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실제로 책임을 졌는가.
  • 질서가 회복됐는가. 사건 이전의 상태로 세계가 돌아갔는가.

세 가지는 자주 함께 온다. 그래서 한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프렌치 커넥션」의 자막은 이 덩어리를 손으로 뜯어 놓는다. 사건은 종결됐고, 정의는 절반만 실현됐고, 질서는 오히려 뒤로 갔다. 마약을 쫓던 형사 둘이 부서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가 어긋나는 자리가 이 글이 볼 지점이다. 장르 이름표로는 그 어긋남이 잘 보이지 않는다.

1948년, 도시가 협조한 영화

「네이키드 시티」(1948, 줄스 다신)는 뉴욕에서 찍혔다. 세트가 아니라 실제 장소였고, 화면에 담긴 사람 중 상당수가 실제 시민이었다. 미국영화연구소 기록에 따르면 25만 피트가 넘는 필름이 소요됐고, 혼잡한 구역에서는 카메라를 숨겨 놓고 촬영했다. 도시 공간 자체를 이야기의 정보로 쓰는 방식은 기생충과 설국열차를 다룬 글에서 따로 정리했는데, 이 영화는 그 계보의 이른 사례이기도 하다.

엔드 크레딧에는 제작자 마크 헬링어가 뉴욕 시장과 경찰청장에게 감사를 표한 문구가 들어 있다. 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 걸음 조심해야 한다. 협조를 받았으니 경찰을 좋게 그렸다고 말하면 자료가 허락하는 선을 넘는다. 확인되는 사실은 협조가 제작의 전제였다는 것뿐이다. 다만 이 조건이 만드는 사람의 판단에 개입할 수 있다는 관찰은 다른 곳에도 남아 있다. 영국영화협회 스크린온라인의 TV 경찰 드라마 해설은, 장수 시리즈를 만들려면 경찰 협조가 중요하고 그래서 방송사와 제작진이 경찰의 심기를 건드리는 선택을 피할 수 있다고 적는다. 같은 글은 영국 경찰 픽션 시리즈 대다수의 메시지가 여전히 범죄는 대가를 치른다는 쪽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카메라가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와 무관하지 않다. 촬영 허가는 대본이 아니지만, 대본이 놓이는 조건이다.

결말이 표현될 수 있었던 범위

이야기 안의 규칙이 인물의 선택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타임루프와 멀티버스를 다룬 글에서 다뤘다. 이번에 볼 것은 이야기 바깥의 조건이다.

미국 영화산업은 1930년에 자율 규약을 만들어 발표했다. 흔히 헤이즈 코드라고 부른다. 규약 문언은 관객의 공감이 범죄와 악행 편에 서게 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고, 범죄를 다룰 때 법과 정의에 맞서 동정을 사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말라고 명시했다. 세부 지침에는 범죄자에게 동정을 보이는 묘사가 주의 항목으로 들어 있었다.

발표와 집행이 같은 해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영국영화협회 매체 『사이트 앤드 사운드』에 실린 마이크 매션의 글은 이 간격을 분명히 한다. 1930년에 규약이 발표됐지만 그것을 집행할 자원을 갖춘 기구는 1934년에야 만들어졌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집행을 맡은 담당자들은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실질적인 통제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규약 이전이라고 부르는 관행은 정확히 말하면 규약 집행 이전을 뜻한다. 1934년 중반 조지프 브린이 새 기구를 맡은 뒤에야 회원사의 모든 영화가 개봉 전 승인을 받아야 했고, 기구는 수정을 요구할 힘을 갖게 됐다.

이 규약은 1950년대를 지나며 힘을 잃었고, 1968년에 등급제로 넘어갔다. 그 이후 미국 영화는 범죄와 도덕의 모호한 영역을 정면으로 다룰 여지가 넓어졌다.

여기서 두 가지를 섞지 않아야 한다. 규약이 요구한 것은 범죄에 대한 공감을 막고 처벌을 보이는 쪽에 가까웠다. 사회 전체의 질서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요구와는 다른 명제다. 앞에서 나눈 세 가지 상태로 옮기면, 규약이 강하게 밀어붙인 것은 두 번째 항목이고 세 번째 항목까지 보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별 작품의 결말을 규약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규약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말하려면 그 작품의 심의 서류나 제작 기록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런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결말을 두고 창작자가 협상해야 하는 상대가 시대마다 달랐다.

잡았는데 남는 것들

세 가지 상태의 어긋남을 화면 위에 그대로 남긴 영화들이 있다.

「프렌치 커넥션」의 자막이 그렇다. 그 자막은 사건 종결과 제도의 상태를 나란히 적고, 둘이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이 읽게 둔다.

「차이나타운」(1974)에 대해 영국영화협회의 네오누아르 안내 글은 이렇게 정리한다. 주인공은 사건을 끝내 풀지 못하고, 그 실패가 개인과 사회 양쪽에 결과를 남긴다. 악당은 뒷골목의 폭력배가 아니라 관료와 사업가이며, 대낮에 뉘우치는 기색 없이 자기 일을 처리한다. 이 글은 1976년 래리 그로스가 『필름 코멘트』에 쓴 표현도 함께 인용한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제도가 범죄 조직과 닮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범죄자가 권력을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현재의 질서 자체라는 것이다.

이런 결말에서 관객이 확인하는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니다. 사건을 처리해야 할 쪽이 사건을 만든 쪽과 얼마나 겹치는지다.

「살인의 추억」, 영화 안과 밖

한국 영화에서 이 어긋남을 가장 또렷하게 남긴 작품은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이다.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 와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영화는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끝난다. 세 가지 상태 중 첫 번째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장르 연구에서도 이 결말은 예외로 다뤄진다. 『영화연구』 94호에 실린 김경욱의 논문 초록은 형사영화 장르의 관습을 이렇게 요약한다. 범죄로 정상적인 사회질서가 교란되면 주인공이 원인을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위협은 결말에서 해소되며 사회는 정상 상태로 복원된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은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결말에 이른다고 적는다. 이 글은 해당 논문의 초록만 확인했으므로 그 이상의 분석은 옮기지 않는다.

영화 바깥의 사실은 별도로 다뤄야 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지만 실제 사건의 재현이 아니고, 두 가지를 섞으면 영화도 사건도 정확하게 다룰 수 없다.

확인된 공식 기록은 이렇다. 법무부는 2022년 12월 1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 사건과 관련된 국가배상소송 두 건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 건은 누명을 쓰고 약 20년을 복역한 사람과 그 가족이 낸 소송이었다. 1심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한 근거로는 경찰의 불법체포와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자백 강요, 그리고 감정 결과의 심각한 오류와 모순이 적시됐다. 다른 한 건은 담당 경찰관들이 살인 사건의 단서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사건을 다르게 처리한 사실이 인정된 소송이었다.

이 기록은 영화의 해석이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 확인한 내용이다. 영화의 미결 결말이 어떤 현실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여기 적는다. 감독이 제도 비판을 의도했는지는 별개 문제이고, 그것을 확인할 인터뷰 자료를 이 글은 갖고 있지 않다.

한국에도 표현의 범위를 규율한 제도가 오래 있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조준형은 중앙정보부가 1961년 설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영화 검열에 관여했고 1968년 하반기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참여했다고 정리한다. 같은 글은 검열 체제가 정확히 언제 끝났는지는 자료가 부족해 확인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밝힌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살인의 추억」이 그 체제가 지나간 뒤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무엇이 금지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만드는 쪽이 고른 결말이다.

이름표를 고쳐 쓰면

누아르는 비관적이고 수사물은 정의를 회복시킨다는 요약은 편하지만 두 군데에서 틀린다.

하나는 이름표 자체다. 앞서 인용한 네오누아르 안내 글이 지적하듯 필름 누아르와 네오누아르는 모두 비평가가 나중에 붙인 명칭이고, 지금 네오누아르의 개척자로 불리는 감독들은 자기가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만들 때 존재하지 않던 분류로 작품의 성격을 설명하면 순서가 뒤집힌다.

다른 하나는 반례다. 「파고」(1996)에서 수사를 이끄는 인물은 마을 경찰서장이고, 그는 사건을 처리한다. 규약이 사라진 뒤에도 회복형 결말은 계속 만들어졌다. 조건이 열렸다는 것과 모두가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이 글이 다룬 것은 세 편의 영화와 몇 건의 문서다. 그것으로 한 시대의 범죄영화 전체를 판정할 수는 없다. 세 가지 상태를 따로 세는 것도 작품에 점수를 매기는 기준이 아니라 읽는 순서를 바꾸는 도구일 뿐이다.

처음의 자막으로 돌아가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프렌치 커넥션」은 마지막 화면을 범인의 얼굴이 아니라 명단에 내줬다. 무엇이 해결됐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았는지를 적은 것이다.

이 글이 근거로 삼은 자료